글쎄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 지 모르겠네요.

다 지난 이야기들을 지금 와서 굳이 꺼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고민도 했었지만 이제 한국의 스윙씬이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많이 받게 된 지금, 그 주인공들인 여러분들도 진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어렵게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전 사실 미국에서 학창생활을 했습니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중,고등학교 시절을 뉴욕에서 보냈었지요. 하지만, 미국생활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과 따돌림 등에 전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었습니다. 당시 비만이었던 저는 asian fat이라고 놀림받으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뚱뚱했던 학창시절 (왕관은 NY프린스 미들스쿨 입학식의 전통)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던 중 어디선가 들려오던 음악소리에 저도 모르게 이끌려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 흑인 할아버지가 흥겨운 재즈음악에 맞춰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춤이나 음악이라고는 전혀 접해본 적 없던 저에게 그 모습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고 즐거워 보였습니다. 어느샌가 저도 뒤뚱뒤뚱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더군요.


멀뚱히 서 있던 저에게 그 할아버지는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들어와서 구경하라고 하더군요. 낯선 미국 땅에서 저를 그렇게 따뜻하게 대해 준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도 그 춤을 배워보겠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전 춤을 춰 본적이 없다고 했지만 괜찮다며 쉬운것부터 가르쳐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리듬에 맞춰 스텝~ 스텝~ 마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너무 신나서 뒤뚱뒤뚱 스텝밟는 모습이 대견해 보이셨던지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꼬마야 너만 괜찮다면 집에 가는 길에 매일 들르렴. 조금씩 가르쳐주마."

그렇게 제 춤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자상하고 친절했던 흑인 할아버지가 바로 '프랭키 매닝'이었습니다.


아...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 그 곳에서도 춤을 추고 계시겠죠?


나중에 들으니 지금은 허름한 동네 댄스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지만 이 분은 왕년에 대단한 활약을 하셨던 분이더군요. 영화도 많이 찍으시고 린디합이란 춤을 거의 처음 만드신 분이었습니다.


전 그날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스튜디오를 들락거리며 조금씩 스윙댄스를 배워갔습니다.

외롭게 지내던 프랭키 할아버지에게 매일 수업료 대신 집에서 만든 한국음식들을 조금씩 갖다 드렸는데 늘 고맙다고 맛있게 드시곤 하셨습니다. 그렇게 한 동양꼬마와 흑인 할아버지의 우정은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6스텝 위주의 춤을 배웠고 3,4개월 후엔 모멘텀과 스트레칭이라는 개념과 스윙아웃을 배웠고, 1년 후엔 좀 더 어려운 패턴들까지도 배울 수 있었고, 2년 정도 지나자 프랭키 할아버지가 젊었을 적 많이 사용하던 에어스텝 같은 것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받아들여 빠르게 성장하는 댄서는 본 적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저도 제 자신에게 놀랐습니다.


놀랍게도 춤을 추면서 살도 점점 빠져 1년 후에는 날씬한 몸을 가질 수 있었고 자신감이 생겼으며 학교 아이들도 더 이상 저를 놀리지 않았습니다.

춤이 가져다 준 변화였습니다.


매주 금요일이면 프랭키 할아버지와 동네 자선 댄스파티를 주최하곤 했었는데, 사람들이 즐거워 하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이 날 촬영을 맡아서 내 사진은 거의 없는 게 아쉽다. 저 로레인 아주머니는 꽤 열정적인 댄서셨는데 자기 사진이 맘에 안든다며 지워달라고 하셨었다. 미안해요 로레인~ ㅎㅎ


3년 정도 지나자 어느날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고 하시더군요. 전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껴 할아버지를 더 졸랐지만 노쇠해져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에게 더 이상 무리한 요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후에 저는 스스로 새로운 패턴들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흑인 아저씨가 스튜디오로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을 '스티븐 미첼'이라고 소개하더군요. 그는 린디합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의아했습니다. 당시 린디합을 추던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왜 굳이 멀리까지 우리를 찾아왔는지 궁금했지요. 린디합이 어려운 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스티븐을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스티븐은 매일같이 우리를 찾아왔고 파트너인 버지니까지 동원된 끊임없는 설득에 우리는 결국 스티븐미첼에게 린디합을 가르쳐주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티칭은 프랭키 할아버지가 하셨지만 할아버지가 움직이기 힘든 때가 많으셨기 때문에 그 때마다 제가 스티븐을 지도했습니다. 제가 나이는 한참 어렸지만 스티븐은 싫은 기색 없이 열심히 배웠죠. 다른 춤을 추던 분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받아들이는 속도가 빨랐습니다. 틈틈이 혼자 공부했던 블루스를 가르쳐 주었더니 스티븐은 무척이나 좋아 하더군요.


얼마후 스티븐은 떠났는데 무척이나 사교적이며 진취적인 사람이라 린디합이란 춤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했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응원했습니다. 단, 제 얘기는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죠. 아마도 흑인들의 정서가 녹아있는 스윙댄스를 한낱 동양꼬마에게서 배웠다는 사실이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작년에 나를 보러 한국에 왔던 스티븐미첼과 함께. 스티븐이 얼굴 작아 보이려고 뒤로 한참 간 거다. 우리 친한 사이라며 굳이 손짓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린디합은 점점 대중화 되어갔고 린디합을 추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저도 방학을 이용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대회도 참가하고 댄스강습도 하며 보내게 되었습니다. 학업과 춤을 병행하는 일은 무척 힘들었지만 즐거운 나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전국 각지의 숨어있는 고수들을 만나 다른 종류의 춤도 익히게 되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 사람들이 린디합을 팝송에 맞춰 추길래 그 느낌이 인상적이어서 '서해안스윙'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왔는데 지금도 west coast swing이란 명칭으로 불리고 있더군요.

어느 날인가는 평소 즐겨 입던 청바지 회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TV광고 안무를 해 줄 수 없겠냐고 하더군요. 전 린디합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다 싶어 전통적인 동작들 몇 가지로 안무를 구성했습니다. 음악은 사람들이 신나게 느낄만한 Louis Prima의 Jump, Jive, An' Wail을 선택했죠. 결국은 이 광고가 이슈가 되어 린디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관계자들과 미팅하다가 '우리는 갑을관계다. 당신들이 광고주니까 갑(甲)이고 내가 을(乙)이다. 한국에서 그렇게 표현한다. 유 아 갑~'라고 했더니 갑자기 그 명칭이 멋있다며 원래는 다른 이름이었던 청바지 브랜드를 '갑'이라고 바꾸더군요.


  큰 이슈가 되었던 갑 TV광고

한 번은 캐나다에 갔는데 어떤 깡마르고 거무튀튀한 친구가 에어리얼을 가르쳐 달라고 하더군요. 저도 에어리얼은 크게 자신이 없었지만 그 친구의 수준은 정말 형편없는 정도였습니다. 피자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이제 막 춤을 시작했던 그는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춤은 감각있게 잘 췄지만 근력이 형편없었죠. 혹독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우선 단단한 몸을 만들어 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저한테 춤을 배우고 있던 한 여자분이 기계체조를 했었던 게 떠올라서 둘을 파트너로 맺어줬습니다. 둘이 에어리얼을 연습하기엔 아주 적당했습니다.
그들에게 뭔가 가능성을 느낀 저는 그동안 머리속으로만 구상해 봤던 초고난이도의 에어리얼을 그들에게 시도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전 파트너가 없어 실천 못했지만 그들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얻을 수 있었죠.
그들은 린디합의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풋풋했던 이들이 바로 맥스/애니였습니다.

88올림픽을 떠올리며 만들어준 studio88 도메인이 보인다. 인터뷰에서 내 얘기를 너무 많이 해서 창피했다. ㅜㅜ


맥스/애니는 프랑스에서 만난적이 있는 토마스와 처음 제게 지터벅을 배웠던 댁스 등 몇 명과 함께 나중에 닌재머스란 팀을 만들고 싶다고 저에게 상의를 하더군요. 하지만 전 일본단어 ninja가 맘에 들지 않아 한국식 명칭인 '자객무도단'이 어떻겠냐고 제의를 했지만 결국 발음이 너무 어려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자객무도단도 괜찮은데



시간이 흘러흘러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 즈음, 나혜석이란 분을 만났습니다. 유학생활 중이던 나혜석 형님도 (여자분 아닙니다.) 저한테 6스텝 지터벅을 처음 배웠었는데 스윙댄스를 한국에 보급하고 싶다던 얘기를 하시더군요. 사실 저는 조심스러웠습니다. 우리나라 정서에 커플댄스가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죠. 춤을 가르친다고 해도 막상 출 공간도 없고 말이죠.
몇날 며칠 나혜석 형님과 토론한 결과 한국의 스윙댄스 도입을 위해서 필요한 몇 가지가 결정이 났습니다.
일단 스윙동호회가 만들어져서 사람들이 부담없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마루바닥에 사람들이 모여서 춤출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럽보다는 더 건전하게 술보다는 음료수 같은 걸 제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bar처럼 말이죠. 스윙바라는 용어는 이렇게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장소가 아닌 환한 대낮에 공개된 장소에서 공개 워크샵을 진행하면 어떨까 하는 의견을 내 놓자 나혜석 형님은 적극 찬성 하더군요. 나혜석 형님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를 원하셔서 여의도공원이나 시청광장이 어떻겠냐고 했었지만 그 공간은 너무 넓고 시끄럽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담하고 조용한 '보라매공원'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더니 흔쾌히 받아들이시더군요.

그리고 저보고 강습을 진행하라는 걸 전 나혜석 형님에게 기회를 드렸습니다. 전 당시만 해도 부끄러움이 많아서 사람들 앞에 그렇게 나서는 성격이 못 되었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제 얘기는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냥 나중에 시간이 많이 많이 지나서 사람들이 춤을 즐기며 행복해 하고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냥 그걸로 전 만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혜석 형님은 제 손을 꼭 붙잡으며 알겠다고 하셨습니다.

마침 우리는 함께 귀국을 하게 되었고 보라매 공원에서 있었던 첫 스윙댄스 워크샵 현장을 멀리서나마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색해 했지만 즐거워 보였고 전 행복했습니다. 아마 그 때 제 뺨에 흐르던 건 눈물은 아니었겠죠.

보라매 공원에서의 역사적인 첫 스윙댄스 강습. 오래된 사진이라 화질이 좋지 않다. 가운데 하얀 베스트 입은 게 나.


제 할일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한 저는 본업인 학업으로 돌아갔고 그 이후 다시는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끼는 버릴 수 없던 것일까요. 2009년 조심스레 동호회 문을 두드려 지터벅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과거를 숨긴 채 다른 이름으로 스윙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전세계 스윙댄서들이 한국의 스윙씬을 주목하는 지금, 실력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인 마인드 때문에 큰 무대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많은 후배들을 보면서 린디합을 발전시키고 보급하는데 앞장선 한 사람으로서 후배댄서들이 한국인 스윙댄서로서의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런 긴 이야기를 힘들게 꺼내게 되었습니다.

자 좀 더 힘을 내도 좋습니다. 좀 더 놀아도 좋습니다. 그대들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let's swing~!!!




2011. 4. 1. 만우절에 씀


  1. 푸른동화 2012.04.02 00:37 신고

    하튼. .. 읽는 내내. 뭔가.. 이건 아닌데.. 했었다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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