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힘든 일을 겪거나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을 때 스스로 혹은 주변으로부터 듣게 되는 격려의 한 마디가 바로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어?' 라는 말이다. 아마도 '산 입에 거미줄 치랴?'가 각박해진 현대사회를 반영해 업그레이드 한 것이리라. '어떻게든 다 채워주시더라' 하는 종교적인 가치관을 떠나서라도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진 않는다고 어떻게든 길이 생기더라고 우리는 들어왔었다.

그런데 어제 있었던 최고은 작가의 사망소식은 이 모든 긍정적인 문구들이 아직도 유효한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한다. 사실 기사상으로는 갑상선 기능항진증과 췌장염 등의 질병이 굶주려 악화되었다고 나와있어 아사(餓死)라는 표현이 과장되지 않은 정확한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 최고은 작가의 비참한 죽음에 굶주림이 원인이었다는 건 그렇게 틀린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굶주려서 죽었단다. 아프리카도 아니고 북한도 아니고 6.25직후도 아니고 글쎄 21세기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난 2011년에 G20의 대한민국에서 사람이 굶주려서 죽었단다. 영화판 사람이었단다. 시나리오 작가였단다. 한 때 내가 가고 싶어했던 학교를 나와서 단편영화 연출도 하고 촉망받는 작가였단다. 그런데 생활고를 비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아니고 다른 연예인들처럼 우울증에 목을 맨 것도 아니고 어제까지도 옆집에 밥을 얻고 그러다가 굶주려 죽었단다.

이번과 같은 경우 언론의 주목이라도 받게되어 대중들에게 알려졌지만 어쩌면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이들 중 이렇게 생의 마지막을 비참하게 맞게 된 것이 처음은 아닐 것이다. 그 이야기는 나를 비롯해 나름 문화예술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비정규직 프리랜서들이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다.

나는 한 때 이런저런 정책적인 안전장치나 보호조치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다.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해야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예를 들어 스크린쿼터라거나 군 가산점 제도라거나 하는 문제들이 그렇다.(군 가산점 제도에 대해서는 아직도 회의적이긴 하지만) 불합리한 사회구조적 문제들 속에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후 생각이 많이 바뀌었지만 문화예술계만 놓고 봤을 때 이러저러한 안전장치들이 예술가들의 창의성과 상상력을 무디게 하고 나태하게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독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방송국에 들어가기 훨씬 전에 우리나라 성우협회에서는 '성우고용보험'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일할 때 받는 보수의 일정비율을 직장인의 고용보험료처럼 남부하고 일이 없고 한가할 때 이른바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대다수의 반대로 이 고용보험제도는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는데 일이 없으면 없었지 '나 일 없음'을 협회에 신고하고 그 얼마되지 않을 돈을 받아 생활하는 행위를 연기자 자존심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 당연하다.

또 연극판에서는 한 때 연극배우들의 보수를 일당제로 추진하는 제도가 논의 된 적이 있었다. 연습과 공연 일자를 합쳐서 하루에 얼마씩 일할 계산하여 보수를 지급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역시 연극배우들의 '우리가 일용직 근로자냐?'라는 반대에 부딪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물론 예로 든 것들은 근본적인 문화계 수익분배구조와는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아티스트들의 자존심이란 이런 것이다. 이러저런 안전장치들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아티스트들이 지금보다 행복해질까는 확실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들은 그렇게 쉽게 상처받는 섬세한 감성들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거다.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영화판 더 나아가 대한민국 문화산업의 구조를 이야기 한다. 달빛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씨가 사망했을 때는 도토리가 어쩌느니 하면서 음악계의 분배구조를 이야기 했었고 수많은 스타들이 그렇게 죽어나갈 때에도 노예계약이니 상납이니 분배구조니 하는 용어들이 등장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영화계의 수익구조나 계약관계들을 이야기하면서 흥분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 밥 먹이는 문제를 포퓰리즘으로 몰고가는 이 나라에선 한 이름 없는 가난한 예술가의 죽음쯤이야 며칠만 지나면 곧 잊혀질 것이다.
아티스트들의 경제적 자립이 개인의 문제일까 사회의 문제일까 사회구조적 문제때문이라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하고 세상이 떠들어 대는 동안에 결국은 또 철저하게 아티스트 개인의 문제로 돌아와 있을 것이다.

어찌 됐건... 현실은 그렇다. 개인의 문제다. 거칠고 각박하고 부당하기까지 한 거대한 구조 속에서 강해지지 못하고 긍정적이지 못한 게다가 감성조차 섬세한 개인의 문제다.

최고은 작가의 사망소식 기사를 읽고 이런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그녀가 그렇게 차가운 골방에서 죽어가도록 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막말로 그렇게 생활이 힘들면 막노동이라도 해서 알바라도 해서 어떻게든 굶진 않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상황이 그렇게까지 악화된 건 개인적인 성격이나 의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런 상황까지 가게 만든 다른 원인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예를 들어 앓고 있던 질환이 그 정도로 치명적이었을 수도 있고 만약 우울증까지 있었다면 그렇게 스스로 비극적인 상황으로 몰고 간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앞에 놓고 그런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 보지 않은 입장에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는 힘들지만난 그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건 먹고살기 위해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자존심 때문에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죽어간 한 가난한 예술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이 시대 모든 아티스트들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다.
골방에서 굶주리며 죽어간 이름모를 작가분의 일이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우리는 어릴 적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들으며 개미처럼 부지런히 살아야지 베짱이처럼 살다가는 추운 겨울날 굶어죽는다고 배웠다. 하지만 세상에는 베짱이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는 거다. 추운 겨울에 배고파 손이 얼어가면서도 기타를 튕겨야 하는 베짱이처럼 굶어죽더라도 춤을 춰야 하고 노래를 불러야 하고 글을 쓰기 위해 펜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다. 그리고 그런 보석같은 존재들이 있기에 세상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거다.

베짱이들이 행복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꿈꾸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행복까진 아니더라도 죽지 않고 살아서 딴따라로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면 좋겠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연극을 시작해 4년 동안의 눈물나는 지망생 생활을 거쳐 성우생활을 시작한 게 어느덧 7년차가 되었다. 나는 지금 어떤 위치에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지인에게 이런저런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구상중이라고, 올해는 어떻게든 판가름이 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나에게 그러더라. "너 요즘 사는 게 힘들구나? 그런 얘기 한 번도 한 적 없었는데..."
꿈꾸는 사람들이 행복한 그 증거로 살고 싶었는데,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나 힘든 걸까? 약해진 걸까?
'내려갈 때가 있으면 올라갈 때도 있는 거지'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이젠 '내려가다가 죽지는 말아야 할텐데' 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이제는 유효하지 않은 자기 최면을 또 한 번 걸어본다.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어?'

posted by 주군

주군의 블로그 구독하기
(구독이란?)

(포스팅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나 동영상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권리는 해당 제작사와 개인에게 있음을 알립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