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연제목 : 버자이너 모놀로그
- 공연장소 : SM 스타홀
- 공연날짜 : 2009. 10. 14(수)
- 출     연 : 이경미 이미윤 박수민

'버자이너'란 단어와 관련해 생각해 보는 우리의 성의식

생각해 보면 억압된 성문화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작품들이 흔히 소재로 사용했던 건 'SEX'였던 것 같습니다. 원나잇이 어떻고 체위가 어떻고 오르가즘이 어떻고 하는 주로 '섹스'라는 행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곤 했었죠. 그래서 그런 경험들을 오픈하고 공유하는 것으로서 성이란 것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려는 노력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그 행위에 앞서 존재하는 바로 '그 곳'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손과 발, 얼굴처럼 그저 우리 몸의 한 부분일 텐데 무슨 홍길동도 아니면서 우리는 '그곳'을 '그곳'으로 말하지 못하고 우린 그저 '거기' '아래쪽' '사타구니' 등 대체 용어를 사용해 왔던 게 사실입니다. 심지어 그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벌개져 버립니다. 성교육이니 올바른 성지식 습득이니 진보적인 척 떠들어대지만 결국 우리는 한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저 역시 차마 활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네요.
여기 '버자이너'에 대한 사전적 설명을 첨부합니다.

버자이너(vagina) n.
; A woman's vagina is the passage connecting her outer sex organs to her womb.


작품 속으로


우리말로는 '**의 독백'이라고 번역되는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희곡작가 이브 엔슬러가 200여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씌어진 희곡을 작품화 한 것인데요, 위노나 라이더, 우피 골드버그, 기네스 펠트로 등 헐리우드 스타들이 이 무대를 거쳐 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 김지숙, 예지원, 이경미 씨의 공연으로 처음 선보였지만 오랫동안 이 작품을 이끌었던 서주희씨의 작품이 가장 유명하죠. 이후 장영남씨도 한동안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지켰고 올 시즌에는 이경미, 최정원, 전수경 씨 등 중견 뮤지컬 스타들을 대학로로 모셔와 1인극이 아닌 3명이 진행하는 토크쇼 형식으로 모습을 바꿉니다. 이경미씨는 2001년 초연을 함께한 원년멤버이니 그 의미도 남다르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번 공연에서는 이경미씨와 함께 이미윤, 박수민 두 배우가 호흡을 맞추고 있습니다.

공연은 토크쇼의 사회자 역할을 맡은 박수민씨의 진행으로 시작됩니다. 세 명의 배우 중 처음으로 '그곳'의 이름을 입밖으로 뱉어야 하는 그 민망함이 참 안쓰럽게 느껴지면서 그 상황이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는 우리 모습이 우습게 보이기도 합니다. 좀처럼 불려지지 않는 그 곳을 소리내어 부르는 것으로 연극이 시작된다 할 수 있을정도로 이후 작품 속에서는 그 단어가 수없이 등장합니다. 역시나 처음이 가장 어려운 걸까요 중반 이후에는 아무렇지도 않더군요.

작품은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드라마로 재구성해 들려주는 형식으로 꾸며집니다. 털이 많아 고민인 여성의 자아찾기에서부터 자신의 그곳을 보고싶어하는 남자친구의 이야기 등 일상적인 이야기들에서부터 여성이 겪게 되는 생리와 폐경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겪었던 혹은 전혀 겪지 못했던 '그곳'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곳'에 대한 추억들과 함께 들춰내지 못했던 아픈 기억들까지 참으로 여러가지 이야기와 함께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죠. 특히 성교육이라고는 전혀 받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그곳'에 대해 평생 관심을 끊고 살아야 했던 어느 할머니의 모습에서는 마음이 짠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원작자가 첨부하라고 보내왔다는 출산에 관한 에피소드와 토크쇼 형식으로 바뀌면서 삽입된 출연자 각자의 이야기는 작품을 더욱 풍성하고 생동감 있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짜여진 극과 자연스러운 일상의 애드립을 넘나드는 배우들의 연기는 무척이나 자연스럽습니다. 맘마미아를 통해 많이 알려진 중견 배우 이경미씨의 관록도 빛이 납니다. 비록 이경미씨의 공연을 접한 건 처음이지만 뮤지컬로 다져진 그 에너지는 소극장을 휘어잡더군요. 이경미씨와 함께 젊은 두 배우들의 호흡도 괜찮습니다. 신음퍼포먼스에서 그야말로 '절정'을 보여주는 이미윤씨와 수줍은 모습으로 극을 진행하면서도 70대 노역을 소화해내는 그 모습은 흐뭇하기 그지 없습니다. 처음엔 MR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라이브 연주여서 깜짝 놀랬던 피아노 반주도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어주는 요소였습니다.

페니스 모놀로그를 꿈꾸며

우린 늘 자유로워지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들을 자유롭게 해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럼 우리들의 몸은 어떨까요? 성의식도 많이 발전했고 몸이 화두가 된 것도 꽤 오래 되었지만 우린 아직도 우리의 몸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아니 얼마나 잘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을까요? 여전히 우리들의 몸을 억압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시인 김춘수는 일찍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 다가와 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그 존재는 사라져 버리고 잊혀지는 거겠죠. 작품 속 대사처럼 우리가 '그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리내어 말할 수 있을 때 우리 몸이 더 건강하고 지혜롭고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상대적으로 사회 속 약자의 위치에 주로 있어왔던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반대로 남자는 어떨까요? 남성의 '페니스'에는 이런 '이야기'가 없는걸까요? 생명의 잉태라는 신성함을 부여받은 '버자이너'에 비해 '페니스'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말초적 쾌락을 담당해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게 남성과 여성의 차이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페니스'가 상대적으로 쾌락의 도구로 치부되는 불운을 겪어 온 것일 수도 있겠지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정자와 난자의 구조와 원리 같은 생물학적 문제와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에 관한 심리학, 인류학적인 문제까지 파고들어야 할 듯 합니다. 지금은 그저 우리가 이름 부르지 못하는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우리 몸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려 합니다. '버자이너'를 소리내어 말할 수 있는 그 때, 아마 '페니스'도 비로소 자유로워지지 않을까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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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숭례문 화재 사건과 미디어법 통과 등 근래 우리 주변에 일어났던 일들을 TV모니터로 보여주면서 시작됩니다. 제목과 그에 대한 설명을 프로그램으로 들었던 터라 책상 하나가 놓여있는 연극의 배경이 취조실이란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갑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걸까요?

두 명의 용의자 '이작가'와 '박형'은 철거민 관련 불법집회 후 숭례문을 방화한 혐의로 취조실에 앉아 있습니다. 두 용의자는 각각 수사관 '김부장'과 '조동중'에게 취조를 받게 됩니다. 물론 각각 다른 취조실에서 따로 따로 취조를 받게 되죠. 2인극 형식을 띄는 이 작품은 2명의 배우가 이렇게 서로 수사관과 용의자가 되어 장면이 바뀔 때마다 1인 2역을 선보입니다. 이러한 설정은 관객에게 연극적인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장소와 무대장치(의상,소품 등)의 한계로 인해 몇몇 장면에서는 어떤 취조실의 어떤 인물인지 좀 헷갈리기도 합니다.

민감한 사안의 법률이(근래 통과된 미디어법을 강하게 암시하는) 다음날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숭례문 화재 사건의 범인을 찾아내야만 하는 상황에서 수사는 두 수사관의 사적인 승부욕까지 개입되어 결국 한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범인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으로까지 변질됩니다. 수사관들은 용의자를 회유하고 설득하고 협박하면서 자백을 유도하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죄수의 딜레마'이론에 나오는 상황설정이 등장합니다. 윌리엄 파운드 스톤의 책 '죄수의 딜레마'에 보면 이런 부분이 나오죠.

범죄를 같이 저지른 당신과 동료가 붙잡혔다. 둘은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독방에 각각 갇혔다. 경찰은 당신들의 죄를 입증하지 못해 경미한 혐의만으로 1년 형에 처할 수 밖에 없다. 그때 경찰이 당신과 동료에게 협상안을 제시했다. “만약 당신이 동료의 죄를 증언하고 동료가 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석방되고 동료는 3년 형을 받을 것이다. 당신과 동료가 모두 서로의 죄를 증언하면 둘 다 2년 형을 받고,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하면 1년 형에 그친다.” 당신과 동료는 자신의 결정을 내릴 때까지 서로의 결정을 알지 못하며 동료가 똑같은 제안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만을 듣는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연극 속의 용의자들에게도 같은 상황이 적용됩니다. 한 쪽이 상대방의 숭례문 방화 사실을 자백하면 바로 풀려나게 되고 상대방은 몇년동안의 형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둘 다 끝까지 혐의를 인정하지 않으면 둘 다 6개월 형에 그치게 되죠. 여기서 가장 좋은 선택은 둘 다 증언을 하지 않고 6개월 형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상대방과 접촉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은 그 믿음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결국 제한된 7시가 되기 직전 자신이 배신당할 지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두 용의자는 거의 동시에 자백을 하게 되지만 곧 진범이 잡히게 되고 난처한 수사관들은 두 용의자의 금강산 관광 경험을 구실로 간첩 혐의를 만들어 내면서 극이 끝나게 됩니다. 엔딩의 간첩 혐의 장면은 무척이나 코믹하게 그려져 있는데요, 지금까지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달려온 시간들이 결국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보다는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그래야 하는' 넌센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이 작품은 '죄수의 딜레마'란 상황설정을 통해서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지 심리적인 탐구를 하면서 동시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사회를 움직이는 건 뭘까 하고 말이죠. 이 사회를 움직이는 건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일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지는 비논리적인 음모론일까요? 극의 첫 장면 수사관의 조수는 관객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로 인해 바깥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간다'라구요.

연 극 속에서처럼 범인을 만들어 내야 하는 상황이 우리 현실에도 존재하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 일개 시민들이 알지 못해야 평화가 유지되는 그런 일들이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연극 '죄수의 딜레마'는 미디어법 통과 현장의 국회 모습을 보여주면서 막을 내립니다.

p.s. 극단 '파랑곰'은 연세대 사과대극회와 총연극회 출신들로 구성된 극단이라고 합니다. 학내 극회 출신답게 사회문제를 다루는 데 익숙한 모습을 보일 뿐 아니라 창작의 노력도 높이 사줄만 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극의 완성도를 만들어 내는 데 미숙한 모습도 살짝 보이는 건 아쉬운 부분입니다. 아마추어 극단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가 재미를 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나오는 작위적인 코미디를 집어넣는 것인데요. 소변이 들어 있는 병을 들어 마신다거나 극의 흐름과 관계 없이 관객에게 극의 참여를 요구한다던가 하는, 극 전체를 흐르는 일정의 선을 넘어선 설정들은 어쩌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답니다.



(이 포스트는 프린지페스티벌 블로그 '프린지데일리'에 동시에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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