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팔 차림으로 여행을 떠났었는데 돌아오니 자켓에 목도리까지 두를까 고민하게 만드는 스산한 날씨가 되어 있다. 고작 열흘의 여행을 끝낸 지금 그렇게 여러가지 변화들이 느껴진다.

ULHS(이하 쇼다운) 여행에서 돌아온 지 몇일이 지났다. 예전같으면 한층 업된 분위기에 돌아오자마자 출빠도 바로 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후기도 올리고 사진들도 올리고 했을텐데 이번엔 뭐랄까 담담하다고 할까 아련하다고 할까 몇일간 출빠도 자제한 채 약간은 숙연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쇼다운 다녀온 다른 댄서들이 대부분 그렇듯 라이브 재즈로 가득차 있던 뉴올리언즈 프렌치쿼터에서의 감흥에서 벗어나기 싫어 그런 것도 있을테고 컴피티션 결과에 대한 아쉬움도 있을테고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그리움때문이기도 할 터다.
그렇게 여행이 끝난 지금, 뉴올리언즈 밴드들의 음악을 들으며 헛헛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 중이다.


프렌치쿼터라는 지역은 뉴올리언즈의 고즈넉하고 아기자기한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인데, 각 거리마다 특색있는 풍경도 그렇고 미시시피강을 지나는 증기선(모양만 증기선일 듯 하지만)도 그렇고 그야말로 허클베리핀[각주:1]이 뛰어다닐 것만 같은 풍경이다.


그리고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는 길거리 밴드의 라이브 재즈 음악과 스윙을 추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에선 돈주고 구하기도 힘든, 재즈바같은데서 듣는 리스닝 위주의 재즈가 아닌 그야말로 쿵짝쿵짝 절로 스윙스텝을 밟게 만드는 귀한 스윙재즈밴드들의 라이브 음악이 하루 종일 거리거리마다 울려 퍼지고 밤이 되면 그 밴드들이 쇼다운 행사장으로 넘어와 새벽녘까지 라이브 연주를 선보인다. 초저녁부터 컴피티션을 포함해 새벽 서너시까지 라이브 스윙재즈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것만으로도 쇼다운을 찾은 보람이 있다.


아마도 이번 쇼다운을 계기로 우리나라 스윙씬 디제잉의 판도에도 좀 변화가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 본다. 소스도 부족했을 뿐더러 뉴올리언즈 스타일 밴드 연주곡들은 이런저런 이유(리듬이 난해하다거나 길이가 길다거나 낯설다거나)로 스윙바에서 몇몇 곡들만 제한적으로 들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 30여명의 한국댄서들이 대거 쇼다운에 다녀오면서 귀를 세뇌?당해 왔고, 해림 등 디제이들은 화요일 타임바 소셜등에서 뉴올리언즈 소스를 바로 적용하려 할 것일테니 말이다. 다른 몇몇 디제이들도 소위 '남부스타일 밴드 음악들'을 풀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는 걸 보면 당분간 출빠할 때 새로운 느낌을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국내에선 어렵사리 1년에 한 번 볼까말까한 챔피언급 댄서들을 한 자리에서 보는 것도 또다른 재미이자 소득이라고 하겠다. 동영상에서만 보던 사람들이 밥먹다 보면 옆 테이블에 있고, 길에서 춤추다 보면 옆에서 같이 춤추고 있고, 밤이 되면 플로어엔 후안샤론이니 토드니 하는 친구들이 수두룩하고 한켠에선 마이키니 앤드류니 하는 친구들이 수다삼매경이다. 잼서클 내 앞뒤론 챈스니 윌리엄이니 하는 기라성같은 댄서들이 등장하니 이게 꿈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여행 내내 그들을 보면서 부러웠던 건 테크닉이나 개인기 같은 게 아니었다. 바로 그들의 여유와 자유로움, 유머감각이었다. 테크닉은 연습으로 따라잡을 수 있을지 몰라도 승부가 걸린 컴피티션 배틀마저 한바탕 놀이로 만들어 버리는 그들의 여유와 유머감각은 어쩌면 그것들마저도 연습을 통해 얻으려 하는 우리들로선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2,30대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춤을 시작하게 되는 인프라. 춤에 대해 아직은 관대하지만은 않은 사회적 시선들. 여러가지 생각들이 스쳐지나가면서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난 늘 자유롭게 춤추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세계 각국에서 모인 수많은 댄서들과 내로라 하는 챔피언급 댄서들 틈바구니에서 이방인으로서의 감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참가한 컴피티션은 그야말로 도전이고 경험이었다. 그 먼 곳까지 가는데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하면서 출전했던 컴피티션들. 한 달 가량 준비하고 있던 공연을 이러저런 이유로 행사 1주일 전에 포기하게 된 건 너무나 아쉬웠지만 덕분에 공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여행을 좀 더 즐길 수 있었던 건 오히려 다행이었다. 첫 컴피티션 종목으로 분위기 적응도 힘들었던 슬로우댄스와 나름 열심히 했던 잭앤질, 프렌치 마켓에서 땡볕과 싸웠던 쇼다운, 너무 일찍 탈락해 억울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했던 솔로재즈와 솔로블루스. 비록 원하는 바를 이룬 건 한 종목도 없었지만 여러 가지 컴피티션 방식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아울러 그동안 같이 연습한다고 애쓴 미소양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여행 내내 유난히 구름 한 점 없이 비현실적이었던 하늘만큼 현실감각 잃어버리기에 충분했던 샌프란시스코와 뉴올리언즈의 분위기 속에서 한 편으로 느껴졌던 감정들은 위화감 혹은 박탈감이었다. 물론 즐거운 여행 과정이었지만 힘들게 온 여행이라는 생각이 맘 한 구석에서 내내 나를 괴롭혔고 스트레스가 되었다. 반면에 함께 했던 다른 이들, 그런 환경에서 나고 자란 이들을 비롯해 일상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진정 삶을 즐기는 여행을 하고 있는 듯 보이는 동료 혹은 친구들을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에서 여행 내내 자유로울 수 없었다.
뉴올리언즈의 마지막 밤 모든 컴피티션을 끝마치고 난 후 마지막 플로어에서 한참을 그냥 앉아 있었다. 아쉬움, 허무함, 부러움, 그리움과 함께 여러가지 감정들이 교차하면서 사람들은 즐겁게 춤을 추고 있던 그 자리가 난 한 없이 슬펐더랬다.


꿈의 무대가 지리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참 안타깝다. 허랭이니 쇼다운이니 ILHC니 린디포커스니 이런 큰 행사들에 또 언제 참가할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같은 비전을 가진 파트너를 만나는 것도 과제고 현재 내 경제적/시간적 상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앞 뒤 안 가리고 무작정 일 저지를만큼 어린 나이도 아니다. 무엇보다 이번에 느꼈던 심리적 부담감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꿈을 꾸는 것 뿐. 그 뿐이다.




p.s.

이미 한 두 달 전부터 미국에 가 있던 제갈량 일행과 룸메이트를 하게 된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얘기가 나와서 이뤄진 챔피언과의 동거는 평소 화려하고 쾌활했던 무대에서의 모습만 보다가 컴피티션을 준비하는 그들의 일상과 애환?까지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값진 경험이었다.

평상시 소셜네트워크 댄서로 자부하던 나였지만 여행 동안 3G데이터 사용이 차단되면서 본의 아니게 여행 이모저모를 공유할 수 없었는데 덕분에 내 소셜활동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스윙댄스 초반 소셜네트워크 활동을 통해 이런저런 많은 이벤트들이 있었고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그만큼 주목받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뉴올리언즈라는 큰 무대를 겪으면서 나 자신이 얼마나 과대평가 되었는지, 보잘 것 없는지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소통도 좋고 정보공유도 좋지만 이제는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집중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들과 모든 감정을 함께 나눠 준 J양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절대로 혼자 겪어내지 못할 여행이었다.

난 왜 딴따라 부나방 인생을 선택해서 이 고생을... ㅋㅋ

사진들은 따로 포스팅 예정
  1. 막상 찾아보니 톰소여, 허클베리, 엉클톰... 어떤 소설도 뉴올리언즈를 배경으로 하고 있진 않더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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